2004. 12. 『民族文化硏究』 41


성리학적 가치관의 확산과 여성

김  현

1. 머리말

2. 강정일당의 성리학

3. 임윤지당의 성리학

4. 조선 후기 성리학의 여성 친화성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가치관의 동향에 관한 일반론에는 서로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조선의 신분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버팀대 역할을 해 오던 그 가치관이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조선 후기에는 점차 무너져 가면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약화되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보다 일반화되어 지배계층인 양반 사대부뿐 아니라 여성이나 하층민까지도 유교 윤리의 준행을 자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 전국민의 10% 미만에 불과하던 양반 호구 수가 후기에는 70%까지 늘어난 것으로 보고된 사실1), 양반가의 재산으로서 그들의 경제 운영 및 권위 유지의 필수 요소였던 노비들의 도망이 빈번히 발생한 사실은 등은 유교적 사회 질서가 점차 와해되어 갔으며, 그 질서를 지탱해 주던 성리학적 가치관이 힘을 잃어 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한 편, 유교 윤리의 준행자로서 국가로부터 표창을 받은 사람들이 양반 사대부가보다 하층민 사이에서 더욱 늘어갔다는 사실2), 상민가의 아낙이 사대부가의 여인의 수절을 흉내내고, 시골의 농부가 재상가의 제사 예법을 따르려 하는 등, 예전에는 상민들에게 요구된 바 없었던 유교 윤리를 이 시대에 그들이 자발적으로 행하고자 한 점은 유교적 가치관이 사회 일반으로 확대되어 간 사례이기도 하다.

상호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두 갈래의 경향은 실은 동전의 양 면처럼 서로 표리를 이루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유교는 원래 남녀 상하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상명하복의 기강을 유지하는 통치술이었으며, 유교의 이러한 면이 조선의 신분 제도를 견고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유교는 그와 동시에 남녀 귀천의 구분 없이 누구나 인격의 완성을 통해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종교적 가르침을 제공하여 왔다. 두 차례의 전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 변동 요인으로 계층적 사회 질서의 버팀대 역할을 해 오던 유교의 신분제적 질서는 후기로 갈수록 점차 문란해져 갔지만 윤리적인 면에서의 인간의 평등적 가치를 추구한 성리학적 도덕 가치관은 신분과 성(性, gender)의 차별을 넘어서서 남녀 상하 일반에게 확산되어간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필자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성리학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남성 중심적 가치관의 벽을 약화시킴으로써 여성들도 그 학문의 주체로서 참여하게 된 사실이다.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부덕의 상징으로 표창되었던 여성들의 수는 조선 전기부터 그 숫자가 적지 않았지만 그 대부분은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윤리 절목을 수용자의 입장에서 충실히 준행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며, 여성 스스로 그 가치관을 원리적으로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많은 사대부가의 여성들, 심지어는 그들의 삶의 전범이 되는 왕실의 여성들까지도 유교가 아닌 불교에서 정신적 소의처(所依處)를 찾았던 사실은3) 여성들이 생활의 외표 면에서는 유교적 예제에 순응하면서도 내면의 정신 세계는 그것과 친화하지 못했던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조선 후기에 이른바 “여성 성리학자”라고 할 만한 인물들이 출현하여 성리학의 깊은 내면 세계를 탐구한 것은 성리학과 여성, 두 영역에서 모두 의미 있게 보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조선 후기의 두 여성 성리학자 정일당 강씨(靜一堂 姜氏, 1772-1832)와 윤지당 임씨(允摯堂 任氏, 1721-1793)의 삶과 생각의 대요를 살펴 보고, 그들의 사상을 통해 드러나는 성리학의 여성 친화성(親和性)이 어떠한 계기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논하고자 한다.4)



2. 강정일당의 성리학5)

1) 생애

정일당은 영조 48년(1772) 충청도 제천에서 아버지 강재수(姜在洙)와 어머니 안동 권씨의 2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계와 모계 모두 선대에는 명문이라고 할 만한 가문이었으며, 특히 어머니 쪽은 기호학파 성리학의 학맥을 계승하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조부 이후 그의 집안은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하였다. 20세에 6세 연하의 남편 윤광연(尹光演)과 결혼하였다. 윤광연의 집안 역시 명문가로서 부친은 기호학파 성리학자들과 고유하였고, 모친은 시문으로 이름이 있었지만, 가정의 경제 상황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일당과 그의 남편 윤광연은 이른 바 조선 말기의 전형적인 “몰락한 양반”의 후예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름난 관료 학자를 선대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지만, 지금은 하루 하루 끼니 걱정을 안 할 수 있는 궁핍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남편 윤광연은 밥벌이를 위해 경상도와 충청도를 오가며 장사 일을 시작했던 듯하다. 그러나 정일당은 그러한 남편에게 눈물로 호소하여 장사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하게 하였다.

윤광연은 정일당의 청을 받아들여 학문은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남편을 공부시키는 가운데 어깨너머로 얻어들은 지식이 쌓이면서 윤지당도 어느덧 학문적 소양을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학식과 문장에 있어 남편을 능가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 정일당은 또 다시 남편에게 강권하여 스승을 정하여 배우고, 학식있는 선비들과 교유토록 하면서 남편의 얻은 바를 전달받는 방법으로 자신의 학식을 넓혀 나아갔다.

윤광연은 소일 삼아 자기 집에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서당을 운영하였을 뿐 생계를 도모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평생을 보냈다. 정일당 역시 바느질 이외에 달리 경제적인 능력이 있지 않았기에 그들의 생활은 극도로 빈궁하였다. 그렇지만, 식량이 끊어진 지 사흘이 지난 상황에서도 자신들 보다 어려운 집안에서 보낸 식량은 돌려보내는6) 등 자신의 엄격한 도덕 기준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미흡한 점이 있으면 어떠한 일도 편의대로 용인하지 않았다.

정일당의 생애는 극한에 가까운 가난 속에서 인내로 영위된 삶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정신 자세는 순일한 마음으로 배움에 정진하여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도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지 않고, 누구에 대한 원망도 없이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담담히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심성을 더욱 고결하게 연마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일당은 1832년(순조 32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일당의 생애와 학문이 그의 죽음과 함께 그대로 민멸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남편이자 평생의 학문적 동지였던 윤광연이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인의 유고를 모아 문집을 간행했기 때문이다.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는 사후 4년이 지난 1836년에 간행되었다.

2) 일상 생활

『유고』에 실린 정일당의 글은 도학적(道學的)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약간의 시(詩)와 남편 윤광연을 대신해서 쓴 서간(書簡), 묘지명(墓誌銘), 행장(行狀), 제문(祭文) 등의 문장 등인데,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남편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적어 보낸 짧막한 쪽지 편지들이다. 그 편지글의 한 편을 통해 정일당의 평상시 생활 모습을 엿보기로 한다.


오늘 아침 손님이 돌아가실 때 왜 만류하지 않으셨읍니까? 보통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어지신 분에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생각컨대 틀림없이 제가 병중에 있기 때문에 수고를 끼칠까 염려하여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항아리에는 아직도 몇 되의 쌀이 있고 병세도 조금 나아지고 있습니다. 어찌 부인 한 사람의 수고를 꺼려 당신의 집안 법도를 그르칠 수 있겠읍니까? 빈객을 접대하는 예법은 조상 제사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니 집안의 큰 일입니다.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7)


일회(日會)8)가 추위를 무릅쓰고 일찍 왔으므로 그 고생을 딱하게 여겨 이렇게 밥을 지으라는 말씀이 계신가요? 예산 시아주버니가 오신지 이미 열흘쯤 되었는데 간혹 죽 대접도 제대로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일회를 위하여 밥을 짓는다면 이는 힘에 부칠 뿐 아니라, 당신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처의 형제를 자기 친족보다 더 대접하는 것이 되고, 저의 입장에서 말하더라도 친정 형제를 시댁 친족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도리에 맞지 않아 분부를 따를 수 없사오니 황송합니다.9)


정일당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의 상당 부분은 이렇듯 일상생활 속의 작은 일에 관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정일당이 평소에 가장 힘썼던 일은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인들 누구에게나 요구되었던 일로서, 정일당이 그러한 일에 성실히 복무한 일은 주목거리가 안 된다. 그러나 필자가 이 점에서 주의 깊게 보고자 하는 것은 정일당이 한 사람의 손님을 접대하고 한 그릇의 밥을 짓는 일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할” 원칙을 상정하고 그 원칙을 철저히 준행하고자 했던 점이다. 이러한 자세는 그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이라고 하는 부인의 과업을 단지 수동적으로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실천하였음을 알게 한다.

인용한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일당과 그의 남편 윤광연의 살림살이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친정 동생에게 밥 한 그릇을 대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빈한하였다. 하지만 정일당이 남긴 그의 삶의 기록 속에는 물질적 가난을 회피하고자 한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가난함을 편히 여기며 도를 즐기는 생활을 한 것이다. 그 같은 가난한 삶은 가세가 기울어 버린 양반가의 후예였던 두 부부의 피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 편으로는 정일당 스스로의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남편이 젊은 시절 생계를 도모하고자 장사를 시작하였을 때 정일당은 이를 눈물로서 만류하고 그저 학문을 하는 선비의 길을 가도록 권유한 것이다. 정일당의 어떠한 사고방식이 그 같은 행동을 하게 하였을까?


배우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할 수 없습니다. 정도(正道)를 버리고 생계를 도모하는 것은 학문을 하면서 빈한하게 사는 것만 못합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지만, 바느질과 베 짜는 것은 조금 알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죽이라도 끓여 올리겠습니다. 원컨대 당신은 성현의 책을 공부하시고 집안 일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10)


남편이 하려는 장사 일을 정일당은 “정도를 버리고 생계를 도모하는 것”으로 폄하하였다. 사람의 올바른 도리는 배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장사를 하게 되면 그 배움의 여가를 잃게 되므로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남편에게 의식주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그에 관해서는 일체의 염려를 끊고 학문에만 전념하라고 하였다. 자신에게 별다른 치부의 방책이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바느질의 수고와 극도의 근검절약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어떤 고통도 인내할 수 있다는 각오로 가난한 선비의 부인이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정일당의 생애는 남편과 자신에게 한 이 서약을 평생토록 충실하게 지켜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일당이 남편에게 그토록 학문을 권한 이유가 그로 하여금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게 하려는 데 있었다면, 그 집념은 그 흔한 입신양명의 동경 정도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의 나이가 어렸던 초년에는 혹 그러한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정일당이 글을 쓰기 시작한 후에 남긴 모든 기록은 그 점에 관한 어떠한 의심의 실마리도 주지 않는다. 정일당이 남편에게 권한 학문은 이른 바 안연(顔淵)이 했던 학문[顔子所學], 아무런 현실적, 공리적 목적 없이 그저 성인을 본받아 바람직한 인간이 되기 위한 도덕적 수양의 학문이었다. 정일당이 남편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는 그들의 학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에게 참다운 덕이 있으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은들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나에게 참다운 덕이 없다면 비록 헛된 명예가 있어도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여기에 옥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돌이라고 해도 옥에게는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또 여기에 돌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옥이라고 해도 돌에게는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당신은 덕을 닦는 데 힘써서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은 걱정하지 마소서.11)


삯바느질을 하는 가운데 남편이 책을 읽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일당은 자신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올바른 인간의 도리를 준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정일당은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 하는 사이 어느덧 자신도 그 학문 속에 깊이 빠져 들게 되었다. 사실 윤광연이 평범한 자질의 보통 선비였던 데 반해 윤지당은 보다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듯하다. 처음에는 남편의 어깨 너머로 시작한 글공부가 어느덧 남편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남편 또한 부인의 학문적 성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와 함께 즐겨 배움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며 글로 문답하였다. 정일당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들 속에는 남편의 잘못된 언행을 지적하고 그것을 고치도록 요구하는 준엄한 책선의 글도 자주 발견된다. 남편의 부인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일당과 윤광연은 이렇듯 학문적 동반자로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공유해 갔지만 빈한한 경제 생활에서 오는 고통은 오랫동안 그들을 떠나지 않았다. 정일당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로 비쳐지는 것은 실은 그가 아홉 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단 한 명도 말을 배울 때까지 키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일당이 자식을 잃은 이유는 그가 아홉번째 딸을 잃은 후에 스스로 지은 딸의 묘비명에서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병약하고 생활이 곤궁하여 제대로 먹이고 돌보지 못한 때문이었다.12) 경제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길 정도로 그를 괴롭혀 온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정일당은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그의 학문 목표-성인이 되고자 한다는 기약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일당이 임종을 맞기 3일 전에 썼다고 하는 다음의 시는 이 점을 잘 말해 준다.


임오년(1822년, 50세) 겨울, 남편은 나에게 오언절구 한 수를 보여주며 학문에 계속 힘쓰도록 독려했는데, 거기에 대한 답시가 떠오르지 않았다. 홀연 어젯밤 꿈속에서 그 시에 대한 답시를 썼는데, 깨어나서도 뚜렷이 기억이 나기에 그것을 기록하여 둔다.


여생이 단지 사흘밖에 남지 않았으니 / 餘生只三日

성현이 되려던 기약 저버려 부끄럽네 / 慙負聖賢期

증자를 생각하며 사모하였더니 / 想慕曾夫子

이제 바로 자리를 바꾸어 죽을 때가 되었네 / 正終易簀時13)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일당의 생애가 과연 다른 사람에게도 권장할 만한 모범적인 여인의 삶이었는가에 대해 이견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생애는 단순히 부덕(婦德)의 상징으로 표창받을 사대부가 여인의 삶 정도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종교적 열정을 품고 그 신앙을 지켜 간 구도자의 삶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일당이 극한에 가까운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신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바로 그 시대의 선비들의 학문-성리학에서 추구한 궁극의 도덕 원리였다.


3) 학문과 수양

정일당이 남긴 저작 가운데 학술적인 성격의 글은 대부분 유실되고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의 학문에 어느 정도의 이론적 깊이와 남다른 특색이 있는지를 밝히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가 학문 활동을 통해 어떠한 정신세계에 도달했는지를 살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정일당은 남편에게 보낸 쪽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사욕(私慾)이라는 것은 내 마음이 좋아하지만 천리(天理)에 맞지 않는 것을 말하며, 예(禮)라는 것은 천리의 바른 절차와 표현입니다. 반드시 먼저 어떤 것이 예이며 어떤 것이 예가 아닌지를 밝힌 연후에, 자기의 사욕을 끊고 한결같이 천리를 따르게 되면 도에 이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14)


보내오신 편지에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약이다” 하시니, 그 말씀의 뜻이 진실로 심원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먼저 그 착한 일이 되게 하는 이치를 탐구하여 그 당연함을 밝게 아신 연후에 착한 일 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여 실천하게 된다면 가장 즐거운 효험을 보게 될 것입니다.15)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이르듯, 정일당은 남편에게 수양의 요체는 근원적인 원리를 체득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론적인 글이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런가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여기에 표현된 내용만으로도 정일당의 학문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세세한 개별 사물의 법칙[分殊之理]을 하나 하나 탐구하기보다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보편적 원리[一原之理]를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사물의 근본 원리에 곧바로 몰입한다고 하는 이 태도는 성리학의 수양 이론인 함양(涵養) 공부에 해당하는 것인데, 정일당이 이 공부법을 이처럼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이 방면의 공부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알게 한다. 남편 윤광연은 정일당이 이룩한 수양 공부의 경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또 평일에 본성(本性)과 천명(天命)의 근원을 연구하며,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는 요령을 탐구하였고, 항상 사물을 응대함에 있어 단정히 앉아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를 체득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매번 병을 앓으면서도 마음을 가다듬어 단정히 앉으면 성(誠), 명(明)의 경계를 볼 수 있고, 자연히 정신과 기운이 화평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병이 몸에서 떠나게 된다”라고 말하였다.16)


“평일에 본성과 천명의 근원을 연구”하고, “단정히 앉아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를 체득”하였다고 하는 정일당의 공부법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바, 인간의 본성은 천리에 근원을 두며, 마음이 발동하기 전인 미발(未發)의 상태에서 그 본성의 순결한 모습을 자각할 수 있다고 하는 이론에 입각한 것이다. 정일당 스스로 그와 같은 수양 공부를 통해 “성(誠), 명(明)의 경계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성(誠)과 명(明)은 『중용(中庸)』에 쓰인 용어로서 궁극적인 도덕 원리인 천리와 그것의 공효를 이름이다. 정일당은 함양(涵養) 공부를 통해 미발시(未發時의) 본성을 체험하고 천리를 직관하였으며 그러한 정신 수양을 통해 육신의 질병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욕에 물들거나 외물에 의해 흔들리지 않은 상태의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천리의 순결함을 그대로 간직한 인간 내면의 본성을 체험하는 일은 정일당에게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던 듯하다. 정일당은 자신이 경험한 수양의 즐거움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하였다.


밤 깊어 온갖 움직임이 고요해지니 / 夜久群動息

빈 뜰엔 달빛이 새하얗다 / 庭空皓月明

마음이 씻긴 듯 맑으니 / 方寸淸如洗

환히 성정을 본다 / 豁然見性情17)


4) 여성관

정일당의 학문은 유교 사회가 여인들에게 요구하였던 윤리 덕목을 암송하고 따라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이론의 핵심을 투철하게 이해하고 그 기반 위에서 미발의 기상을 체현하는 수양 공부를 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였다.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동시대 사회에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정일당의 학문의 그와 같은 수준은 성(性, gender)의 경계를 넘어서서 남성들의 정신세계에 진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일당은 이 점에 관해 스스로 어떠한 판단을 하였을까? 정일당의 문장 가운데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을 보기로 한다.


저는 일개 부인으로서 몸은 집안에 갇혀 있고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으나, 그래도 바느질하고 청소하는 여가에 옛 경서와 고전들을 읽으면서 그 이치를 궁리하고 옛 사람들의 행실을 본받아 선현들의 경지에 이르기를 작정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당신은 대장부로서 뜻을 세워 학문을 하면서 스승을 모시고 좋은 벗들과 사귀고 있으니, 부지런히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가면 무엇을 배우든지 능하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강론하든지 해명하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실천하든지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인의를 실천하여, 온당하고 바른 마음을 세워서 성현을 배운다면, 누가 그것을 제지하겠습니까? 성현도 대장부이며, 당신도 대장부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바라옵건대 날마다 덕을 새롭게 하고 반드시 성현이 되기를 기약하소서!18)


정일당은 집안을 지키는 것이 부인의 본분이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배움의 기회가 적었고 견문이 좁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여성인 자신이 성현을 닮기 위한 노력의 면에서 남편보다 더 분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남성인 당신이 자기에 못 미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 글 속에서 정일당은 여인들에게 환경의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학문을 소홀히 할 이유가 되지 않으며, 자신은 그러한 제약에 안주하지 않고 독서와 궁리를 통해 성리학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 성인을 본받는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정일당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모 된 사람들이 세속의 구구한 말을 듣고 딸에게 공부시키는 것을 큰 금기로 여기기 때문에 부녀자들 중에는 전혀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매우 가소로운 일입니다. 윤지당(允摯堂)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비록 부인이지만 하늘에서 받은 성품은 애당초 남녀의 차이가 없다”하셨고 또, “부인으로 태어나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와 같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자포자기한 사람들이다”고 하셨읍니다. 그렇다면 비록 부인들이라도 큰 실천과 업적이 있으면 가히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19)


정일당이 지적한 “세속의 구구한 말”이란 오늘날에도 일부 운위되는 “여자의 공부는 무용하다”느니,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면 박복하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일 것이다. 그러한 말의 연유가 어디에 있든간에 전통시대의 여성 교육은 어머니와 부인으로서의 행실을 바르게 하는 데 치중하였으며, 그 이상의 윈리적인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차단되어 있었다. 그 시대의 성리학이 남성 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도리를 찾는 필수적인 배움으로 인식되었으면서도 그 학문의 담지자가 남성들에게만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성 차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일당은 성현을 닮고자 하는 학문 수양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이 없다고 하는 점을 확신함으로써 그와 같은 차별적 사고를 극복하였다.

정일당이 그러한 차별적 사고를 과감히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보다 먼저 성리학적 학문 수양의 길을 개척한 선배 여성 학자가 있었던 사실에 기인한다. 윤지당 임씨(允摯堂 任氏)는 정일당으로 하여금 학문 수양의 자질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한 확신을 갖게 한 인물이었다.



3. 임윤지당의 성리학

1) 생애

정일당의 정신적 스승이라고 해도 무방할 윤지당 임씨(任允摯堂, 1721-1793)는 그보다 반 세기 앞선 시기에 노론계 기호학파 사대부 집안에서 부친 노은(老隱) 임적(任適, 1685-1728)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딸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이름있는 성리학자였던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와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1727-1796)는 윤지당의 친형제들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윤지당은 둘째 오빠 임성주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그로부터 경사(經史)에 관한 지식을 익혔다.20)

윤지당은 19세(1739)에 원주 지방의 신씨 집안에 출가하였으나 8년만에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었다. 그의 남편 신광유(申光裕)는 큰아버지 댁의 양자로 들어갔었기 때문에 그는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고, 또 그 자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친동생 신광우(申光祐)의 자식을 양자로 들였다. 이로 인해 윤지당은 남은 생애를 시동생 집에서 보냈는데,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그의 지위에 어긋남이 없는 품행을 보여 가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친정에서 학문을 익혀오긴 했어도 시집간 후에는 여자가 학문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꺼려하여 일체 책이나 문자를 가까이 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다가 노년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독서와 저술을 다시 시작하였다. 평소에 그를 극진히 섬겼던 시동생조차 노년에 이르러 밤중에 윤지당의 방에 불이 켜 있고 낮은 목소리로 책을 읽는 것을 목도한 연후에야 그가 은밀히 학문에 뜻을 두어 왔음을 알았다고 한다.21)

윤지당의 남긴 글들은 그의 사후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라는 제호로 친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에 의해 간행되었다.


2) 심성론(心性論)

서른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의 글은 모두가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한 이론이나 윤리적 수양에 관한 것이다. 정일당이 남긴 글의 성격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거기에는 그래도 약간의 문학적인 시․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반해 윤지당의 글은 보다 이론적으로 사변적인 논설이 주를 이룬다. 윤지당의 글의 특색은 조선시대 어느 여류 문인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정밀한 철학 이론을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윤지당의 철학적 논문 성격의 글은 비록 그 양이 많은 것은 아니나 본체론, 심성론 등 성리학적 이론 방면의 중요한 주제들은 빈틈없이 언급되어서, 그가 어떠한 세계관과 인성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분명하게 할 수 있게 한다.22)

윤지당의 본체관과 심성관은 기본적으로 그의 오빠 임성주가 천명한 ‘이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의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본체의 세계에서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며, 따라서 이가 인간의 마음 속에 타재한 모습인 성(性), 기의 역동성으로 인해 현상적인 심리작용을 일으키는 심(心)도 실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윤지당이 이와 기를 동일시하는 일원적 본체관을 개진한 것은 이(理)로 설명되는 도덕성과 기(氣)로 설명되는 역동성을 하나로 합치시켜 인간의 도덕적 실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윤지당은 인간의 심이 도덕적이면서 실천적인 주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 이론은 왜 필요한가? 이(理)로 설명되는 성의 선함만 가지고는 인간의 도덕 능력이 완벽하게 입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윤지당은 성과 심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심(心)이 갖추고 있는 이(理)이며, 심이라는 것은 성이 깃들어 있는 그릇이니, 이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령한 신명이 헤아릴 수 없이 변화하는 것은 심(心)이며, 허령한 신명이 헤아릴 수 없이 변화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이에는 작위 능력이 없지만, 심에는 작위 능력이 있고, 이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없지만 심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 이가 없으면 발현할 것이 없고 심이 없으면 발현하게 할 수가 없다. 어찌 이기(理氣)가 서로 혼융한 마당에 성이 홀로 발현하고 심이 홀로 발현하는 이치가 있겠는가?23)


“이에는 작위 능력이 없지만, 기에는 작위 능력이 있고, 이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없지만 기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 “이가 없으면 발현할 것이 없고 기가 없으면 발현하게 할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은 이기의 관계에 대한 성리학의 일반론이다. 그런데 윤지당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기’라는 단어를 ‘심’이라는 단어로 대치하였다.24)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윤지당은 그의 오빠 임성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심을 이루는 기가 이의 도덕성을 그대로 발현시킬 수 있는 순수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연유에서 자발적인 활동성을 가진 기를 곧바로 인간의 심과 일치시킨 것이다.

윤지당이 ‘기’를 ‘심’으로 바꾸게 된 배경에는, 기의 작위 능력을 곧바로 심의 도덕적 실천 능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지당은 “어찌 이기가 서로 혼융한 마당에 성이 홀로 발현하고 심이 홀로 발현하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성과 하나가 된 심은 충분히 도덕성을 발현할 수 있다고 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윤지당의 이와 같은 심론은 전적으로 임성주의 학문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의 철학을 무조건 답습한 것이 아니라 오빠에 못지않은 학문적 성찰을 거친 후 그보다 더 간명한 이론으로서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지당이 성리학적 심성론의 영역에서 확립한 이러한 이론은 그로 하여금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 실천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였고, 그 확신의 연장선상에서 여성인 자신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낳게 하였다고 보여진다.


3) 중용설(中庸說)

이기심성에 관한 논문 이외에 윤지당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중용경의(中庸經義)」라고 하는 제목의 『중용(中庸)』 해설서이다. 윤지당은 젊었을 때부터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경문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정립하는 노력을 기울여 오다가, 만년(65세, 1786)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이 도달한 바를 정리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윤지당의 「중용경의」속에는 그 자신이 깊은 통찰을 통해 얻은 도체에 대한 자각과 그 도체를 체현하여 성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반드시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수양의 공효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다. 윤지당은 그가 공부한 『중용』의 총체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중용』 한 책은 모두 “도는 가히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처음에는 천하의 대본(大本)을 말하였고 중간에는 그것을 만 가지 일로 흩어 말하였고, 끝에는 다시 합쳐서 대본을 만들었다.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한 절목은 또한 중간 만사의 핵심이 된다. 『중용』 한 편의 서두와 결말은 의리가 정밀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글을 지어 뜻을 담은 것이 또한 극히 미묘하다. 참으로 성인의 말씀이다.

중용의 도는 ‘진실하여 망령되지 않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책의 요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성실로써 근본을 삼아 독실하고 공손한 데로 순치시키고, 천하가 태평하게 되는 성대한 목적을 이루려는 데 있다. 이것은 성인의 지극히 성실한 덕이 자연히 응한 것이고, 성스러운 신(神)의 조화가 극도로 구현된 것이다.25)


윤지당은 『중용』의 모든 내용이 총체적으로 “도에서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중용』 1장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不睹․不聞)과 ‘은밀하고 미세한 것’(隱․微)을 인간의 마음에 품부된 도체가 심지사려로 발현하는 과정으로 해석하고, 이것이 곧 인간이 도에서부터 떠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하였다. 윤지당은 『중용』에서 말한 ‘부도(不睹)’와 ‘불문(不聞)’을 자기 자신이 아직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단계 즉, 하늘에서 품부된 본성이 심지사려로 발출하기 이전인 미발(未發)의 상태로 이해하고 ‘은(隱)’과 ‘미(微)’는 자신은 지각할 수 있으나 외부로 표출되지는 않는 이발(已發)의 초기 단계로 해석하였다. 홀로 있을 때 삼가는 신독의 수양을 전형적인 성리학의 수양법인 존양(存養)․성찰(省察)의 길로 이해한 것이다. 미발의 때에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본성을 보존하고, 이발의 때에 그것이 조화를 깨뜨리지 않도록 살피는 존양․성찰의 수양법은 성리학의 대표적 경(敬) 공부의 방법이지만, 윤지당이 계신공구(戒愼恐懼) 및 신독(愼獨)의 공부를 이처럼 곧바로 존양․성찰에 대입한 것은 그가 내 마음 속의 도체를 보존하는 것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윤지당의 『중용』 해석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주안점은 ‘인간은 누구나 노력에 의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다. 자신의 성품이 요(堯)․순(舜)의 성품과 같다는 것을 알고 힘써 실천하면 그 성과는 태어나면서부터 천리를 알고 있는 성인과 같아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26) 그는 『중용』 27장의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모이지 않는다”는 말을 지목하면서 “모인다[凝]는 말에 가장 묘미가 있다”고 하였다.27) 모인다는 것은 작은 조각들이 여기저기 산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엉겨서 점점 더 크고 단단한 덩어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윤지당이 이 단어에 의미를 둔 것은 바로 배움을 통해 점점 더 완성된 경지로 커 가는 뜻을 새겼기 때문이다. 함양(涵養)을 통해 마음의 본 모습이 바로 서서 사욕에 흔들리지 않게 하고, 치지(致知)를 통해 이치를 밝혀 어리석은 판단에 빠지지 않게 하는 노력을 계속하면 도체의 단서들이 점점 더 모여 엉겨서 결국에는 깨뜨리고자 하여도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함에 이르게 된다. 윤지당은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을 기약하였다.28)

「중용경의」를 통해 볼 수 있는 윤지당의 성리설의 특색은 그가 도체를 원리적․추상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체현하는 역동적인 실체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중용』에서 제시된 자연과 인간의 최고 덕목인 성(誠)에 대해, “하늘에서는 실리(實理)요, 인간에게서는 실심(實心)”이라고 해석하였다.29) 전통적인 성리학 이론을 따르자면 하늘의 이(理)는 인간의 성(性)에 대응하는 것이며, 이때의 이(理)와 성(性)은 작위(作爲)의 능력, 즉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윤지당은 성(誠)을 이(理)라고 하면서 그것을 바로 인간의 심(心)에 대응시켰다. 윤지당이 “우주에서는 만물을 낳고 생동케 하는 담일(湛一)한 신명(神明)이며, 인간에서는 일신(一身)을 주재하는 허령(虛靈)한 정신(精神)”이라고 이해한30) 심(心)은 이(理)와 기(氣)의 합일체로서 이(理)의 윤리성과 기(氣)의 역동성을 함께 보유하는 것이다. 도체가 이미 역동적 실체라면 그것을 따르는 노력은 억지로 힘들여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그것에 내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체와 합일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누구에게 열려 있는 천하 만인에게 공유된 길[達道]이다. 윤지당이 중용의 도를 한 순간도 떠날 수 없는 것, 누구나 그 길을 가 완성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확신하게 된 배경에는 도체에 대한 그러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31)


4) 여성관

도덕 원리에 대한 투철한 자각과 수양의 공효에 대한 확신 속에서 윤지당은 성인을 닮고자 하는 자세를 자신의 일상 생활 속에서 일관되게 추구하였다. 물론 윤지당의 일상 생활은 그 시대 다른 사대부가 여인들에 비해 특별히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윤지당의 평상시 삶에 대해 “제사를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일로부터 친척 이웃 및 집안 식구들을 대하고 가사를 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 때 그 때 본분을 다하여 마땅하게 하셨다”32)고 한 동생 임정주의 술회는 그가 당시의 사대부가 여성들에게 일반적으로 기대되던 준칙을 모범적으로 준행한 여인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윤지당에게 자신에게 있어 자신의 그와 같은 삶의 의미는 여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히 추구해 할 도덕적인 삶을 여성의 직분에 맞는 모습으로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윤지당의 그러한 생활 신조에 대해 임정주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윤지당은) 평소에 말씀하시기를, “하늘은 강건하고, 땅은 유순한 것은 각기 그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태사(太姒)와 문왕(文王)의 행적에 다름이 있는 것은 나뉨의 차이[分殊] 때문이며, 천성을 다함이 동일한 것은 그 이치가 하나[理一]이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뀌었다면 또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인으로 태어나서 태임(太任)과 태사(太姒)와 같이 되기를 기약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버리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다.33)


윤지당은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그것은 윈리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원리가 현상으로 드러날 때 나타나는 양태의 차이라고 여겼다. 이른바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일분수(理一分殊)의 논리를 차용한 것이다. 이(理)는 보편적인 것으로 누구에게 있어서나 동일하다[理一]. 그것이 타재한 현상적 지반에 따라 드러내는 모습이 다를지라도[分殊], 그 다름이 보편적 원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리학은 현상 세계의 차별성에만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그것의 보편적 본원을 자각하여 분수의 세계가 그 윈리에 다시 합치하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윤지당은 여성의 직분을 중시하되, 그 직분 자체를 궁극의 목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구별이 없는 궁극의 도덕 원리를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고 방식을 가졌던 윤지당에게 있어, 이기심을 극복하고 예를 실천함으로써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부여한 어진 천성[仁]을 자신의 인격으로 완성시키는 일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상의 과제였다. 윤지당은 「극기복례위인설」이라고 하는 논문에서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윤리적 책무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 하늘이 사람을 내실 때 누구인들 어질지 않게 하셨겠는가마는 그 마음이 몸에 얽매이고 자포자기 하는 것을 편히 여기면서, “나는 기질이 불미하니 어찌 성현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눈치를 살피고 주저하면서 자기 욕심대로 무례한 짓을 행하여 하품의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기며, 그러는 가운데 초목과 함께 썩어가는 것의 불쌍함과 금수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한다. 아! 이런 사람들은 가리우고 병든 것이 너무 심해 ‘어짊’에 대해 이야기 할 수조차 없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신 어찌해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 내가 비록 여인이기는 하지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에는 처음부터 남녀의 차이가 없는 것이니, 비록 안연이 배운 바를 따라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인을 사모하는 뜻만큼은 매우 간절하다. 그런 까닭에 생각한 바를 여기에 기술하여 나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34)



4. 조선 후기 성리학의 여성 친화성

지금까지 우리는 강정일당과 임윤지당 두 여성 학자가 남긴 저작을 통해 조선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이었던 성리학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윤지당, 정일당 두 여인은 남성들 사이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였고, 집안의 가족과 친지들이 어렸을 때부터 학문의 분위를 조성해 주었으며, 정일당에게는 남편, 윤지당에는 오빠, 동생과 같은 평생의 학문적 동반자가 있었으며, 죽은 후에는 남편이나 시동생과 같은 남성 후원자들이 그의 업적이 민멸되지 않도록 서책을 발간해 주는 행운이 있음으로써 이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조선시대의 여성 성리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경우 한 가지도 얻기 어려운 조건을 중첩해서 가졌던 사람들이고 보면, 이들의 삶과 생각은 ‘전체를 대변하는 사례’라기보다 ‘매우 희소한 예외’로 간주하는 것이 올바른 자리매김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정일당과 윤지당의 학문에서 성리학과 여성 사이의 친화성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이유는 이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성 - 성리학과 여성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고 한 뚜렷한 사고가 그 시대 성리학의 학문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과 학문의 관계에 관해 정일당과 윤지당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성인이 되는 데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여서 특별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이야기를 여성들 스스로 체현한 증거가 왜 윤지당과 정일당 이전의 시대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인가?

기독교 신앙의 지향점이 구원에 있고, 불교 신앙이 추구하는 바가 해탈에 있다고 한다면, 성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성인(聖人)’ 이라고 하는 완성된 인격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실상 성리학 어느 면에도 성인은 남자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없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여자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해 온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성리학의 원류인 중국 주대(周代)의 원시 유학은 그 태생에서부터 통치자를 위한 제왕의 학문으로 출발하였다. 유학이 추구하는 완성된 인격체 ‘성인’의 모델은 요(堯)․순(舜)과 같은 고대의 제왕이었다. 이들은 지상의 최고 통치자로서의 지위와 함께 자연의 섭리를 체득하여 인사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와 덕을 겸비한 인물들이었다. 성리학이 탄생한 중국 송대(宋代)에 이르러 제왕이 아닌 사대부들이 스스로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섬으로써 이 성학(聖學)이 추구하는 완성된 인격은 제왕뿐 아니라 사대부들에게도 인생을 건 학문 역정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양에 매진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확보된 인격을 기반으로 이상적인 통치 행위, 즉 왕도정치를 실현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되려 하는 성학의 배경이 이러하다면,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격, 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며, 그러한 치자(治者)의 지위와 무관한 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그것을 추구할 동기가 미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비록 이론적으로 “성인은 누구나 될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성인이 되기 위해 분발할 수 있는 사람은 지배계층의 남성으로 한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조선 후기에 와서 윤지당이나 정일당과 같은 여인이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필생의 노력을 기울인 것을 그저 평이한 사실로만 여길 수는 없다. 여성 성리학자가 출현할 정도로 성리학과 여성이 가까워지게 된 원인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그 발전 과정에서 신분과 성에 대한 차별 의식을 스스로 완화시켜 가는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그 결과 과거에 성리학 세계의 비주류였던 피지배계층과 여성들도 스스로 그 세계의 주인을 자처하며 무대의 중심에 올라서려는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의 발현 문제까지를 꿰뚫는 성리학의 대표적인 이론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성리학에서 이(理)는 자연 만물의 존재 원리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것은 실은 인간이 스스로 어떤 존재이고 싶은 이상적 열망을 객관 세계에 투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자들은 그 이(理)를 우주적인 원리로 상정함으로써 그것에 지존의 지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 이가 모든 사물 속에 내재하여 그 개별 사물의 본성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인간 개개인이 우주의 근본 원리에 짝하는 완전한 인격을 가져야 하는 당위성과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이기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어 그 고결한 본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을 성리학자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성리학자들은 기(氣)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기는 이의 이상을 현실 속의 존재로 형상화하는 데 필요한 질료와 에너지의 공급원이다. 그런데 기라고 하는 것은 순수한 이와는 달리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무수한 차별성을 갖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기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자연만물은 형태와 성질이 다르며, 비교적 순수한 기를 얻어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들도 그 안에서 덕성의 차이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인간은 무차별적이고 완전한 본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의 차별성으로 인해 현실적인 우열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리학적 인간관의 기본 전제이다. 하지만 그 이론은 이 단계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제약하는 불순한 기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사회가 예교(禮敎)로 이끌어져야 하는 이유가 그 점에서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성리학의 이러한 이론은 유교 경전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예교의 훈련을 쌓은 양반 사대부들이 중앙정부와 지역사회에서 지배적인 권력을 갖는 것을 성공적으로 합리화하였다. 양반 사족(士族)이 행정 실무를 담당한 아전 서리들이나 생산직에 종사한 상민․노비들보다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학문 연마와 심성 수양을 통해 보편적 이상인 이(理)의 본연에 좀더 접근한 인격을 보유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기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주자 성리학 본래의 이원론적 사고는 신분간의 차별성과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합리화시킴으로서 그 사회의 신분질서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후기로 들어오면서 사족(士族) 학자들의 성리학 이론 속에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엄정했던 이와 기의 구별이 모호해지면서 그 두 가지가 일체시 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35)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의 상대자인 기는 본래부터 양면성을 갖는 것이었다. 기는 이의 실현을 돕는 보조자임과 동시에 이의 이상을 가로막는 방해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는 기의 속성 중 후자보다는 전자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기는 본래부터 순수하여 이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임이 강조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변화는 ‘인간 누구나 기품의 구애 없이 자발적인 의지로서 도덕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도출했다.

조선 성리학에서 순화된 기 개념의 정립을 통해, 관념적인 본성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데 머물지 않고 현실적인 인간의 마음의 도덕 능력을 천명한 이론은 기호학파의 낙론계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러한 방향성을 뚜렷이 부각시킨 대표적인 학자는 바로 윤지당의 오빠인 녹문 임성주였다. 순화된 기의 보편성을 전제로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자연의 순수성과 상통하는 도덕 실천 능력을 가졌다고 한 임성주의 철학은 윤지당에게 그대로 전수되어36)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계발하게 하였다. 정일당이 바로 그 윤지당을 흠모하고 그의 학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 상호간의 차별성보다는 보편성, 동일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꾸준히 발전해 온 조선성리학의 변화가 남녀의 성에 관련해서도 도덕적 평등관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5. 맺음말

조선 후기 성리학의 내용과 기능을 전기의 그것과 비교할 때 드러나는 대표적인 변화상은, 그 학문이 도덕 능력의 평등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유교의 본래 영역이었던 경세론적 분야에 소홀해진 반면 궁극의 실체를 체험하고 그것과 일체가 되어 영원성에 도달하려 하는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하였다는 점이다. 인간들의 이기적인 욕구가 상충하는 현실 세계를 이끌어 가는 경세사상의 영역에서는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신분과 능력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직분에 충실하도록 한다는 계층적․분별적 사고가 큰 역할을 한다. 반면에 인간 도덕성의 근원인 궁극의 실재를 추구하는 종교사상의 영역에서는 그러한 차별적 사고보다는 누구나 그 실재를 자기화 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사고가 더 우세하게 된다. 성리학은 원래 그 두 가지 영역, 두 가지 사고 방식을 절충적으로 수용하여 양자간의 정미한 균형을 추구한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우리나라 성리학은 전자보다는 후자 쪽으로 기울어간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이 후기로 갈수록 종교적 색채를 강화하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지목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리학적 사고의 담지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의 역할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조선 초기만 해도 전체 인구의 10% 이내였던 사족 출신들은 도덕 수양을 중시하는 성리학을 연마하면서도 그 학문 활동의 목표를 정치적 지도자의 지위에 올라 세상을 다스리는 데 두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70%에 달하는 사람들이 양반임을 자처하며 살았던 조선 후기에는 학문을 한다고 해도 그 목표를 “정치적 이상의 실현”에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정치적 출로(出路)가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된 상황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사족의 후예들은 그 공부의 목표를 다른 데 둘 수밖에 없었다. 일군의 학자들은 성리학적에서 한 걸음 비켜 나 바깥 세계로부터 소개된 새로운 문물이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에 와 닿는 역사나 과학의 세세한 사실에 관심을 두기도 했지만, 여전히 성리학의 세계에 머물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 학문의 주제를 정치적, 사회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것에 집중시켜, 사회적 공효와는 무관하게 내 개인의 생각과 삶을 순결하게 하는 종교적 목표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윤지당과 정일당에게서 보이는 성리학과 여성의 친화는 조선 후기 성리학이 정치성이나 사회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대신 종교적 특색을 강화한 데서 온 부수 효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37) 윤지당과 정일당은 어느 남성 성리학자 못지않게 성리학적 도덕 관념에 투철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의 사고 속에서 그 도덕 가치의 사회적 실현에 대한 관심을 찾아 볼 수는 없다. 『중용』에서 성실함[誠]으로 표현된 궁극의 도덕 원리를 순일한 마음가짐으로 내 삶 속에 체현하는 경건한 일상생활이 그들의 학문 목표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여성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관심의 범위를 그 정도로만 제약한 것이 아니라 당대 성리학의 일반적인 학문 풍토가 그러했기 때문에 이들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 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지당, 정일당과 같은 조선시대 여성 성리학자의 출현은 일부 특별한 여성이 성리학의 남녀차별적 사고를 극복한 사례라기보다 조선 성리학의 이론이 여성들도 그 학문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 간 결과이다. 그렇지만, 성리학이 종교성의 강화를 통해 여성들이 입로(入路)를 연 사실이 정치사상, 사회사상 부분에 내포되어 있던 남녀 차별적 요소를 모두 해소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실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여전히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사고에 얽혀 있는 유교와 여성 간의 갈등은 그 사고의 잔영을 안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풀어 나아가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다. ◆


주제어 : 임윤지당, 강정일당, 여성 성리학자, 조선 후기 성리학, 윤리적 평등관



참고문헌

姜靜一堂, 『靜一堂遺稿』, 1835년(헌종 1)

任允摯堂, 『允摯堂遺稿』, 1796년(정조 20)

任靖周, 『雲湖集』, 1817년(순조 17)

任聖周, 『鹿門集』, 1795년(정조 19)

李  珥, 『栗谷全書』, 1749년(영조 25)


연세대학교 매지학술연구소, 『임윤지당의 생애와 사상』, 원주:원주문화원. 2002.

이영춘, 『강정일당』, 서울:가람기획, 2002.

全汝康, 『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 (이재정 역), 서울:예문서원, 1999

이영춘, 『임윤지당』, 서울:혜안, 1998.

미아지마 히로시, 『양반』(노영구 역), 서울:강, 1997

김  현, 『임성주의 생의철학』, 서울:한길사, 1995.

박  주, 『朝鮮時代의 旌表政策』, 서울:일조각, 1990.


이영춘, 「조선후기 여성지식인들의 자아의식」, 『조선시대 양반사회와 문화 3 -조선시대 사회의 모습-』, 서울:집문당, 2003.

김  현, 「조선후기 미발심론(未發心論)의 심학적(心學的) 전개」, 『民族文化硏究』 제37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이영춘, 「강정일당의 생애와 사상」, 『조선시대사학보』 13집, 2000.

김  현, 「鹿門學派의 哲學 - 현실적 도덕 주체성의 확립」, 『조선유학의 학파들』, 한국사상연구회, 1996.

이순구, 「조선 초기 여성의 신앙 생활」, 『역사학보』 150집, 역사학회, 1996.




 1) 일인학자 시카다 히로시(四方博)의 대구 지방 호적 연구에 의하면, 17세기말(1690) 이 지방의 호구 조사에서 9.2%, 53.7%, 37.1%였던 양반 호(戶), 상민 호, 노비 호의 비율은 19세기 중반(1858)에 오면 70.3%, 28.2%, 1.5%의 비율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 『양반』(서울:강, 1996) pp. 254-261.)


 2) 박주, 「朋黨政治와 旌表政策의 强化」, 『朝鮮時代의 旌表政策』(일조각, 1990).


 3) 이순구, 「조선 초기 여성의 신앙 생활」, 『역사학보』 150집(1996. 6.), 역사학회.


 4) 조선후기에 임윤지당과 강정일당과 같은 여성 성리학자가 출현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영춘은 “조선 중기 이후 양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여성들의 교육열은 일반적인 문예나 학문에 대한 여성들의 교양을 증대시켰고, 다수의 여성 문학가와 학자들을 배출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영․정조대의 문예부흥적 시대 분위기에도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이영춘,「조선후기 여성지식인들의 자아의식」, 『조선시대 양반사회와 문화 3 -조선시대 사회의 모습-』, 서울:집문당, 2003.) 필자는 이영춘의 견해에 더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성격이 순수하게 학술적인 면보다는 영원성에 합일하려는 종교적인 색채를 강화해 갔고, 이것이 여성들의 성리학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만든 한 원인이 되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두 사람의 삶과 조선 후기 성리학 이론 변화 사이의 연계성을 밝혀 보고자 한 것이다.


 5) 본 논문의 심사 과정에서, “본문 내용의 순서를 윤지당과 정일당 양인의 생존 시기에 맞추어 유지당 - 정일당 순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적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 그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정일당에 대한 논의를 앞세운 이유는, “구도자적 삶”의 모습을 보다 여실히 살필 수 있는 정일당의 학문을 먼저 소개한 후, 조선시대 여인에게서 그러한 삶의 모습이 있게 된 연원을 윤지당의 학문에서 찾는 순서가 본 논문의 논지 전개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 「尺牘 29」, 『靜一堂遺稿』 尺牘(이영춘, 『강정일당』(서울 : 가람기획, 2002) 제2편 「국역 정일당유고」 p. 83).


 7) 「尺牘 8」, 『靜一堂遺稿』 尺牘(이영춘, 같은 책. p. 74).


 8) 정일당의 친정 동생.


 9) 「尺牘 9」,『靜一堂遺稿』 尺牘(이영춘, 같은 책. p. 74).


10) 姜元會, 「行狀」, 『靜一堂遺稿』 附錄(이영춘, 같은 책. p. 145).


11) 「尺牘 12」, 『靜一堂遺稿』 尺牘(이영춘, 같은 책. p. 76).


12) 「殤女瘞誌」, 『靜一堂遺稿』 墓誌銘(이영춘, 같은 책. pp. 105-106).


13) 「壬午冬....」, 『靜一堂遺稿』 詩(이영춘, 같은 책. p. 60).


14) 「夫子書」, 『靜一堂遺稿』 書(이영춘, 같은 책. p. 70).


15) 「尺牘 36」, 『靜一堂遺稿』 尺牘(이영춘, 같은 책. p. 87).


16) 尹光演, 「祭亡室孺人姜氏文」, 『靜一堂遺稿』 附錄(이영춘, 같은 책. p. 167).


17) 「夜坐」, 『靜一堂遺稿』 詩(이영춘, 같은 책. pp. 53-54).


18) 「尺牘 46」, 『靜一堂遺稿』 尺牘(이영춘, 같은 책. pp. 91-92).


19) 「尺牘 42」, 『靜一堂遺稿』 尺牘(이영춘, 같은 책. p. 90).


20) 任靖周, 「姊氏允摯堂遺事」, 『雲湖集』 권6 遺事.


21) 申光祐, 「允摯堂遺稿跋文」, 『允摯堂遺稿』(이영춘, 『임윤지당』(서울:혜안, 1998) 「국역 윤지당유고」 p. 282).


22) 윤지당의 글 가운데 특히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과 「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이라고 두 편의 글에서 그의 정밀한 성리학 이론을 살필 수 있다.


23) 「人心道心四端七情說」, 『允摯堂遺稿』 上篇(이영춘, 같은 책. pp. 195-196 참조).


24) 윤지당의 “이에는 작위 능력이 없지만, 심에는 작위 능력이 있고, 이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없지만 심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 이가 없으면 발현할 것이 없고 심이 없으면 발현하게 할 수가 없다.”(理無爲而心有爲, 理無迹而心有迹. 非理無所發, 非心不能發.)는 말은 이이(李珥)의 말 “理無形也, 氣有形也, 理無爲也, 氣有爲也.”(「答成浩原」, 『栗谷全書』 卷10, 書2), “非氣則不能發, 非理則無所發.”(「答成浩原附問書 壬申」, 『栗谷全書』卷10 書2) 등을 인용하면서 “氣”를 “心”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5) 「中庸」, 『允摯堂遺稿』下篇 經義(이영춘, 같은 책. pp. 271-272).


26) 「中庸」20章, 『允摯堂遺稿』下篇 經義(이영춘, 같은 책. p. 263).


27) 「中庸」27章, 『允摯堂遺稿』下篇 經義(이영춘, 같은 책. p. 268).


28) 같은 글(이영춘, 같은 책. p. 270).


29) 「中庸」25章, 『允摯堂遺稿』下篇 經義(이영춘, 같은 책. p. 267).


30) 「人心道心四端七情說」, 『允摯堂遺稿』上篇 說(이영춘, 같은 책. p. 194).


31) 拙稿, 「임윤지당의 경학사상」, 『임윤지당의 생애와 사상』(원주문화원, 2002). p. 240.


32) 任靖周, 「遺事」, 『允摯堂遺稿』 附錄(이영춘, 같은 책. p. 280).


33) 같은 글(이영춘, 같은 책. pp. 281-282 참조).


34) 「克己復禮爲仁說」, 『允摯堂遺稿』 上篇 說(이영춘, 같은 책. pp. 204-205 참조).


35) 미발(未發) 상태의 심(心이) 순선함을 주장한 이간(李柬, 1677-1727)과 그의 이론을 계승한 낙론계의 이재(李縡, 1680-1746), 그의 제자 임성주 등은 그 심의 순선성의 근거로서 기의 순수성을 강조하였다. 그 이론은 결국 이(理)와 기(氣)의 차별성보다는 상호의존성에 치중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이와 기의 내용이 같다고 하는 ‘이기동실론(理氣同實論)’으로 발전하였다. 이기동실(理氣同實)에 대한 언급은 李柬, 「未發辨後說」, 『巍巖遺稿』 권13 雜著, 4b / 任聖周, 「答李伯訥」, 『鹿門集』 권5 書, 6a 등에서 찾을 수 있다.


36) 윤지당의 성리설과 임성주의 학문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졸고 「鹿門學派의 哲學 - 현실적 도덕 주체성의 확립」(『조선유학의 학파들』, 한국사상연구회, 1996)에서 논급하였다.


37) 조선 후기 성리학이 종교적 특색을 강화해 간 것에 대해서는, 졸고 「조선후기 미발심론(未發心論)의 심학적(心學的) 전개」(『民族文化硏究』 제37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에서 논급하였다.